'원더보이' 마이클 오언 - 릴싸위키
플레이 스타일
발빠른 공격수의 표본. 전성기의 라이언 긱스와 아르연 로번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기술은 지양하고 단순 스피드로만 수비수를 제쳐내는데에 특기가 있었다. 위치 선정 또한
상위권 클래스인 통에 헤딩으로도 적잖은 골을 넣은 바 있다. 하지만 스피드에 근거한 플레이스타일통에 잦은 부상을 당했고, 맨유 시절부턴 포처의 플레이 스타일을 따랐다.
'원더 보이'의 등장.. 발롱도르를 거머쥐다.
리버풀의 우수한 유스 시스템덕에 리버풀 로컬보이 유스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던 마이클 오언은 96/97시즌 리그 26라운드 웜블던전에서 베르게르와의 교체로 성인무대
데뷔를 치뤘고, 이 경기서 데뷔골을 넣었다. 하지만 팀에는 이미 로비 파울러를 비롯한 공격수들이 있었기에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시즌부터는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셰필드전 해트트릭은 전설의 서막을 알리는 듯 했다. 풀타임으로 출전한 첫시즌에 골든 부트를 수상했다. 이 모든게 18살
에게 일어난 일이다.
19살의 오언도 파괴적이였다. 두시즌 연속 리그 18골을 넣는데에 성공한다. 심지어 리즈 전의 오금 부상통에 마지막 리그 7경기를 통으로 쉬었는데도 득점왕을 달성했다.
하지만 리즈 전의 오금부상이 뼈아팠다. 2시즌 연속 득점왕을 거머쥔 그지만, 99-00시즌의 오언은 재활에 집중해야했다. 얕궃게도 오금 부상이 여러차례 재발하면서 시즌의
여러 경기를 놓쳤고, 시즌 통틀어 12골을 넣어 잦은 부상을 감안하면 꽤 고무적인 기록일수도 있으나 현실적으로 리그 11골을 넣는 주전공격수로 이렇다할 성과를 낼수있는
팀은 거의 없다. 결국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 출전권 마저도 놓치게된다.
그렇게 별이 지나했다. 하지만 00-01시즌 들어서 리그 초반 5경기에서 6골을 넣어 비로소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전체적으로 봤을때 리그에서는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FA컵과 UEFA컵에선 각각 3골과 4골씩을 넣으며 존재감을 톡톡히 보였다. 리버풀이 미니 트레블(FA컵, 리그컵, UEFA컵)을 일궈내는데에 적지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브라질 호나우두에 이어 두번째로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발롱도르 수상 이후 173경기에 출전해 90골을 넣어 전성기의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팀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챔피언스리그에 진출만 하면 조별리그에서
무너지고, 심지어 03-04시즌엔 챔피언스리그에 아예 출전하지 못했다.
리그컵은 줄곧 잘 우승해왔지만 메이저 트로피를 원했던 그는 2002년부터 구애를 해온 한 스페인 클럽의 제의를 받게 되는데..
'마드리드로 떠나다'... 하지만 1년만에 EPL 리턴.
오언의 마드리드 이적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바로 이적료 때문이다. 오언정도의 실력을 가진 스타가 마드리드의 이적을 감행했다하면 꽤 묵직한 돈들이 오갔을거같지만
실상 이적료는 8m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리버풀 팬들의 공분을 많이 샀다.
뒤도 안돌아보고 마드리드로 떠난 마이클 오언은 결과론적으론 실패했다. 04-05시즌 마이클 오언의 성적표는 45경기 16골 4도움. 하지만 출전시간이 2446분이다.
(풀타임 시 4050분) 그래서 후대엔 출전시간에 비하면 출중한 활약이였다고 평가했지만, 그 당시엔 그저 서브 공격수에 불과했다.
이에 호비뉴와 줄리우 바프티스타까지 팀에 오자 마이클 오언의 방출은 시간문제처럼 보였고, 결국 1년만에 다시 EPL로 돌아왔다. 소속팀은 뉴캐슬로 바뀌었다.
구단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6.8m(약 260억원)를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10년이 지나서야 깨졌을정도로 그당시엔 꽤나 센세이셔널한 이적이였다.
뉴캐슬 시절 사진은 죄다 이포즈로 찍혔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감에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뉴캐슬의 오언은 처참했다. 선수 개인의 기량하락이라기 보단 스피드가 주가되는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선수의
한계점이 드러난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뉴캐슬에 입성하고나서 4시즌동안 79경기에 출전했다. 커리어 초반엔 오금만 다쳤지만 뉴캐슬에선 중족골, 십자인대, 허벅지 등 여러군데가 말썽이였다.
79경기밖에 출전을 못했지만 30골을 넣어 득점력 하나는 아예 녹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액의 주급을 받는 클럽 최고 이적료 기록을 타이한 스타 공격수가 시즌 내내
재활운동만 하고있는데 어느 팬이 그걸 달갑게 받아들일까.
잦은 부상에 비해 높은 주급때문에 그를 사려는 팀은 많지 않았다. 한때 발롱도르도 받았던 공격수의 다음 행선지가 그리스 리그가 될 수도 있다는 한편으론 안타까운
얘기마저도 나왔다.
하지만.....
퍼거슨, 그리고 리그 우승.. 말년은 스토크 시티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적이 일어났다. 말많고 탈많았던 그를 데려간 클럽은 아니다다를까 맨유였던 것이다. 퍼거슨은 리버풀 시절부터 오언을 데려오고 싶어했고, 그제서야
그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이적으로 리버풀 팬들에게 더욱이 원성을 사게된 계기가 된다. 그들에겐 리버풀 로컬보이가 맨유로 이적한다는건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쟁의 승자는 결국 오언이였다. 전성기였던 리버풀 시절에도 이뤄내지 못한 리그우승을 이적 후 두시즌째인 10-11시즌에 이뤄냈다. 부상통에 예전처럼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는 플레이스타일은 지양하였고, 대신 좋은 위치선정을 통해 득점을 이뤄내는 '포처'역할을 주로 맡았었다.
이 능력을 잘 발휘해내어 하마터면 나락으로 몰릴수도 있었던 선수생활을 잘 이어갔다. 맨유에서 세시즌간 17골을 기록했다. 물론 09-10시즌 4-3 맨시티전의 극장골도 포함이다.
맨유와의 3년계약이 끝나고, 나이는 30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차기 행선지는 중동 리그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국 이적시장 막바지에 스토크 시티가 그를 데려갔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됬는지 맞춰보시라, 또 부상으로 얼룩졌다. 시즌 통틀어 9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넣는데에 그쳤다. 하지만 마냥 비아냥댈수는 없는 시즌이다. 한시즌에서
유일하게 넣은 한골이 본인 커리어의 EPL 150번째 골이였기 때문이다. 그 골로 EPL에서 150골을 기록한 7번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앞전에 수도없이 언급했던 부상과 더불어 늘어만가는 나이탓에 33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해 파란만장했던 그의 선수 커리어의 막을 내렸다.
잉글랜드의 미래와 희망.. 그리고 할리우드 액션.
연령별 대표팀에서 부터 떡잎자체가 남달랐다는걸 선보였다. 그도 그럴게 이미 EPL 득점왕을 거머쥔 상태에서의 연령별 대표팀이였기에 성인무대 데뷔는 문자 그대로
시간문제였으리라.
결국 열아홉의 나이로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게된다. 루마니아전 데뷔골에 힘입어 16강 아르헨티나전에 선발출전하게된다. 팀은 바티스투타에 선제골을 먹혔지만
전반 10분경 로베르토 아얄라에게 걸려넘어진듯한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여 PK를 얻어내었고, 6분후엔 모두가 기억하는 그 최고의 골을 넣는데에 성공한다. 전반 막판에
인테르의 심장 하비에르 사네티에 동점골을 먹히고 만회를 못하여 결국 승부차기에 패하였지만, 오언의 활약과 헐리우드 액션은 충분히 인상적이였다.
유로 2000은 조 운이 좋지 못했다. 루마니아, 독일, 포르투갈과 한 조가 되었고 오언은 루마니아를 상대로 다시한번 골을 넣게되지만 팀은 조별리그에서 1승 2패로 광탈하였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그당시 발롱도르 위너였던 마이클 오언의 합류는 당연한 얘기였다. 조별리그에선 골을 넣지 못했지만, 또 다시 한번 모두가 기억하는
그 장면을 연출한다. 현 토트넘 감독인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발을 걸려 넘어진듯한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였고, 그당시 심판이였던 콜리나 주심은 곧바로 PK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PK골을 잘 지켜낸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 상대로 또 다시 이겨냈다.
이후 덴마크와의 16강전,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한골씩을 기록하지만, 대회 우승팀인 브라질이 호나우지뉴의 '외계인 프리킥'에 힘입어 2:1로 이겼고, 잉글랜드는 8강에서
고배를 마셔야했다.
이후 04 유로에 출전해 1골 2도움을 기록해 팀의 16강을 견인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지만 뉴캐슬에서 한창 부상으로 일관했던 시기와 겹쳐져 아쉽게도 따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한다.
결국 이 대회를 끝으로 메이저 대회와의 연은 끊기게 되었고, 이후에 유로 예선전에도 몇번 출전해 여러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지만 결국 2008년 3월 26일날 열린
프랑스와의 국가 친선전을 이후로 한번도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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